실존은 본질에 앞선다. 본질은 주관적이며 고정된 하나의 사실이 아니다. 페이퍼 나이프를 만드는 사람에게 페이퍼 나이프의 본질은 책장 사이사이를 가르는 용도지만, 다른 이는 서류 밀봉을 뜯거나 택배 테이프를 뜯는데 사용할 수 있다. 페이퍼 나이프의 재질, 무게, 형태는 고정적이지만 본질은 사용하는 이의 주관에 따라 변한다.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.
이 비유에는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. 본질과 역할은 같은가? 실존이 고정적이고 본질이 쉽게 변하는게,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? 각자 독립적인 관계인게 아닐까?
내게 철학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다. “실존은 본질에 앞선다”는 사실 자체는 공허하다. 이 명제는 세계에 무수한 가능성이 있어 가능한 여러 조합 중 하나다. 레고블록 수백개가 들어있는 상자속에서 아무 블록이나 두개를 집어 조립해도 연결이 가능하다. 연결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이 중요한가?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다. “실존은 본질에 앞선다”는 명제가 실존해도, 스스로 본질을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.
이 명제는 삶에도 적용되어 의미가 있다. 사람 또한 본질을 부여받지 않고 태어난다. 만약 창조주나 부모가 아이에게 본질을 부여해도, 다른 이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본질은 다를 것이고, 아이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본질은 또 다를 것이다.
본질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. 어떤 경험을 하고, 어떤 유전을 가지고 있고,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같은 대상에 대한 본질이 달라진다. 맥락은 완벽히 공유할 수 없어 사람마다 생각하는 본질이 엇비슷해도 완벽히 같을 수 없다.
그래서 더 좋은 본질을 원한다면 직접 더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. 이건 힘든 과정이어서, 기술로 해결했을 때 사업성이 있다. 사람들의 고민과 선택을 줄여주는 기술들이 그렇다. 추천 알고리즘, 큐레이션, 로드맵 제시등이 만족감을 주는 건 그러한 까닭이다.
